[객지- 황석영]
2009/07/05 17:37

 '진보에 대한 배신이냐', '신념에 대한 소신이냐'라는 논쟁에서 황석영은 유라시아 구상을 펼쳐 보였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신념이라는 뜻이리라.

 개인의 신념이 어떤 선상에 섰건 그것은 개인의 자유겠지만, 그래도 아군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변절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보쪽에서는 충격이었고 보수쪽에서는 의외였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유라시아 구상에서 모든 정치적 포장지를 뜯어낸다고 하더라도 '시기'가 그의 진정성에 흠집을 내고도 남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가 남겼던 유라시아 구상을 꼼꼼히 읽으려 다시 한 번 그의 블로그를 찾았지만, 꽤 길고 정성들였던 그의 글은 비공개인지 삭제인지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글이 사라져 버린 이유 역시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는 독자들에 대한 실망인지, 자신이 보기에도 민망한 변명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그의 글에 '그 선택에 있어 후회가 적길 바란다'는 짧은 댓글을 남기고, 그 사건 이후 시간이 꽤 지난 오늘 도서관 한 켠에 자리 잡은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황석영의 [객지]. 토목깡패의 행패와 노동착취에 대한 전위적이고 공격적인 글은 중편이어도 금새 읽게 만들었다. 1971년에 창비를 통해 세상에 나온 작품. 무려 38년 전 작품이다.


 노동력 착취로 인해 일해도 빚만 늘어나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노동자는 쟁의를 하고, 소장은 야비한 꼼수로 대응한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먹는 고용주. 그런 야비한 꼼수를 작가는 냉철하게 꼬집는다.

"공사장에서 인부들을 선동해서 함부로 쟁의를 하는 건 위법이란 말야."
"어째서 위법이오?"
"몰라서 묻나, 그건 말이지 빨갱이 새끼들이나 할 짓이거든."
"우리가 느이 패들같이 공사장 간부들에 빌붙어 인부들 피나 빨아먹데, 아니면 입찰판에서 떡값을 뜯더냐, 요정에 앉아 공사 거래건을 수표루 주고 받더냐, 공사비를 잘라 먹더냐, 이 개새끼들아. 느이 똥걸레 같은 새끼들이 나더러 빨갱이라구? 느이 놈들 구린 밑구멍 닦을 생각은 않고 피땀 흘려 억척같이 옳게 살아 보려는 사람들보구 빨갱이라니, 네 따위 새끼들이 여길 꺼지면 나두 얌전히 물러날지 모르지만…… 그 전엔 저 개펄 속에 파묻혀두 못 떠나겠다."

 작가는 어떤 쟁의든 권력과 가진자에 맞서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 '빨갱이'로 몰아가는 왜곡되고 날조된 시선에 대해 그들보다 더한 행태로 부당이득을 취하는 작자들의 행태를 고발한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한 짓도 하는 작자들도 있는데, 그들을 상대로 쟁의를 한다는 행위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포장을 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어쨌든 권력을 쥔 자는 피지배계층을 이데올로기로 공격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반체제인사는 결국 정치적, 사회적 제재를 받기 마련. 분란과 소란을 일으키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그저 깔끔하고 간편하고 확실한 방법은 '빨갱이'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실. 그리고 노동력이 착취 당하는 현실에서 황석영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쩌면 자네들은 혜택을 못 받게 될지도 모를 텐데? 돈이 생겨, 술이 생기는가, 도대체 뭘 바라고 이런 짓을 벌이나? 덮어놓고 불평불만을 터뜨려보자는 식이로군."
"우리가 못 받으면, 뒤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 개선된 노동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거요."
 
 71년 이 글을 쓴 황석영은 변했을까?
 김지하도 황석영도 자신들의 세계관을 구축한 나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그들이 겪은 삶의 궤적이 너무 방대하다. 그들을 이루는 단백질 하나하나에 연륜이 있을 것이며, 경험이 있을 것이며, 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다소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유라시아 구상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황석영의 세계관을 따라가지 못하는 탓이리라.

 황석영은 변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어쩌면 그는 변하지 않았지만, 정부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의 연장선상에서 그를 날조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쟁의해? 너 빨갱이"의 시선으로 "동조해? 너 배신자"라며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혹은 소장의 사주를 받아 쟁의를 회유하러 온 변절자 장씨의 모습이 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싸워야 할 대상은 장씨가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 현실이다. 장씨를 변절자로 지목하고 그를 비난한들, 떡밥을 위해 쟁의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에게 술판을 벌이고, 잔치를 벌이고, 임금을 올려주고, 휴식시간을 주는 일시적인 회유책에 넘어가지 않을자 누구일까? 변절자들의 호의호식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심연에 도사리고 있다면, 작품 속 인부들처럼 한 사람을 남긴 채 모두 떡밥에 낚여 쟁의를 포기할 것이다. 황석영에 화나는 이유가 권력의 굴레에 들어가 호의호식할 것에 대한 못마땅일까? 아니면 정치적 동지의 배신에 대한 분개일까? 아니면 진보의 한 축을 상실한 데 대한 허탈함일까?
 
 보다 나은 유토피아와 청사진을 내 보이는 그의 의중이 '그만 싸우고 내려오라'는 회유인지, 아니면 그게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뒤에 오는 누군가가 개선된 조건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의 신념과 양심에 따른 행위라 믿고 싶다.

 이 글을 통해 그를 비난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그가 변절자 장씨라 하더라도, 싸워야 할 대상은 장씨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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